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마이징거 (문단 편집) == [[게슈타포]]에서의 활동 == [[1934년]] [[4월]]에 하이드리히가 [[게슈타포]] 정치경찰부장이 되면서 [[베를린]]으로 이동한 후 마이징거는 곧 하이드리히의 추천으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로 이동했다. [[1934년]] [[6월]]의 [[장검의 밤]] 사건 당시에 가톨릭 정치가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조사를 담당한 그는 하이드리히에게 위험인물로 보고하기도 했다. 그 결과 클라우제너는 [[6월 30일]]에 친위대원에게 총살당했다. [[1935년]] 초에 게슈타포 제2부[* 정치경찰부, 부장은 하이드리히]의 NSDAP, 낙태, 175조(동성연애금지), 순혈문제 담당과의 과장으로 부임한 마이징거는 반히틀러파와 임신중절, 동성연애, 유대인 분리정책을 담당하여 [[1936년]] [[7월]]에는 육군 총사령관인 [[베르너 폰 프리치]] 장군의 동성연애 의혹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. 이 때 마이징거의 조사는 2년 후 프리치 장군의 사퇴에 사용되었다. [[1936년]] [[4월]]에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한 마이징거는 [[1937년]]에 다시 중령으로 승진했지만 다소 오만한 성격 탓에 게슈타포 내부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. 상사였던 하이드리히조차 그를 Widerling[* 불쾌한 녀석]으로 부를 정도였다. 결국 마이징거는 게슈타포를 떠나 [[1938년]]에 친위대의 공문서보관소 국장으로 좌천되고 말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